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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리포트
제목
어둡고 키 낮은 골목 위로 뜬 밝고 푸른 달 - 서현종 화가
작성자
최삼경
작성일
2020.01.28
조회수
1251
내용
어둡고 키 낮은 골목 위로 뜬 밝고 푸른 달 ? 서현종 화가

어둡고 키 낮은 골목 위로 뜬 밝고 푸른 달 ? 서현종 화가


어느 하루 시간을 내어 서울 인사동과 삼청동쪽 전시관을 돌며 그림을 감상하다가 문득 그림에 지역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작가가 나고 자란 풍토대로 대부분은 그 지역의 햇빛과 바람, 언덕과 사람을 소비하고 그리겠지만 때로는 터무니없는 전혀 다른 소재로 이역異域의 감성을 북돋는 이들도 있다. 고암 이응노는 프랑스에서 한글과 한자의 특성을 더욱 발휘한 문자추상으로 동양의 기운생동을 불러 일으켰는가 하면 천경자는 남태평양,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여인들의 원시적 관능을 그려 세계성을 확보하였다. 이를 문학으로 확대해 보면 헤르만 헤세, 알퐁스 도데, 루쉰 등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한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품을 쓴 사례는 너무 많이 있다. 그러고 보면 예술 작품은 자기만의 지역성으로 세계성을 획득하는 것이 성패여부를 가늠하는 일일 테다.

이런 지역성의 예는 아니지만, 보통의 전업 작가들은 별수 없이 고향에 자리 잡고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 군대 생활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있어 본 일 없이 그림을 그려 온 이가 있으니 서현종 화가이다. 체구에 비해 다소 좀 머리가 큰 게 아닌가 싶지만 이런 저런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수줍고 천진하다. 먼저 어릴 때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미술 시간을 젤 싫어했어요. 물론 산수가 더 싫긴 했지만~^^, 그 이유는 미술시간이 내겐 빈부의 격차를 확연히 나타내주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다섯 남매 중 막내인 나는 쓸만한 재료가 하나도 없었죠. 다른 아이들은 새 크레파스, 물감, 물통....... 그뿐인가요, 고운 모래를 가져가야 하는 날이면 다른 아이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비닐 포장된 고운 모래를 가져오는데 나는 엄마가 집 앞 공사장 모래를 퍼다 검정 비닐에 챙겨주셨어요.” 아~ 이 웃지 못 할 가난의 역사라니, 하고 웃으려다 보니 익숙한 우리의 지나온 모습이었다.

그가 중학교 때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준비가 활발했는데 80년 전두환 정부는 컬러텔레비전을 시작했고, 이에 걸맞게 옷이며 신발이며 각종의 브랜드로 각양의 스포츠 상품들이 저마다의 로고를 자랑하며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미술에는 소질이 있었는지 당시 그 메이커들의 마크 디자인에 매료가 되었지요. 디자인이라는 말도 없었고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저 도안이라는 말이었죠. 나는 선생님들 몽둥이에 그 비싼 상표를 하나씩 그려 넣었고 선생님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거랑 미술이랑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죠. 고등학교 때는 그 남들 다 있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좋은 대학에 목표를 두었죠. 처음엔 국어, 영어, 불어 같은 어학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관심만 있고 공부를 안했으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올라갈 생각이 없게 된 거지요. 그러다가 마침 2학년 겨울 쯤 내 짝이 된 아이가 우연히 내 연습장을 보더니 ‘너 디자인 전공하면 잘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초특급 팔랑귀답게 진로를 결정했지요. 그래서 아버지 허락을 받기 위한 용기를 내었죠.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집에는 가끔 오셨지만 또 그만큼 엄하셨으니 정말 용기가 필요했었죠.

그렇게 해서 산업 디자인과를 가게 됐다고 한다. “사실 누구나 그렇지만 대학에 대한 환상이 있었기에 실망도 컸지요. ‘캠퍼스 잔디 위에 누워~ 낭만~’ 뭐 이럴 줄 알았는데 거의 매일 최루탄 속에서 살았지요. 기실 산디과는 운동이니 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먼 과였죠. 그래서 나랑은 무관하다 생각하고 고교 시절보다 더 잠도 못자고 밤새 불 켜진 실기실에서 자고 먹고 집에는 가끔 옷만 갈아입을 정도였죠. 오죽하면 같은 과 학생들끼리 ‘강대속의 하버드’란 푸념도 하던 시절이었지요. 전통이 짧은 신생과라 필사의 생존본능 같은 거였죠. 그때 산디과는 공대에 속해 있어서 낯선 하얀 가운을 입고 물리실험실습도 해야 했고, 듣보잡 미분적분학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어요. 어쨌든 이런 시간에 지쳤는지 3학년 2학기 때 화실로 도망치듯 해서 크레파스 그림을 그리게 되었죠. 그렇게 1991년 첫 ‘크레파스 전’을 마치고 입대를 하고 복학은 생각도 안 했었는디 어찌어찌 학과에서 집으로, 집에서 부대로 연락이 돼 휴학조치를 할 수 있었죠. 이때 얼마나 부모님 말을 안 들었는지 제대할 때쯤에는 군에 말뚝 박는 게 아버지한테 안 맞아 죽고 사는 길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었지요.” 하며 웃는다.

그는 대학교 다니면서 입시 미술화실에서 입시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선생님은 어떤 그림을 그리세요? 한번 보고 싶네요”, “이번 전시 때 네 작품도 출품 하니?”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가볍게 지나가는 질문이라도 조금씩 맘속에 쌓였던지, 아니면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조그만 켄트지에 크레파스로 끼적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재료, 시간 등등이 열악한 화실이었으나 작가로서 자기 그림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쌓인 그림을 보고 주위에서 전시를 하라는 권유가 이어져 시내에 위치한 유명 클래식 카페 두 곳에서 전시를 했고, 결과는 완판이었다고 한다. 선, 후배 다 동네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그림 값으로 책과 술을 사주기도 하고 더러는 떼어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첫 전시 때는 겁을 먹었지만, 예상외의 호평으로 고무된 그는 학교 졸업 후 입시학원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자 다짐했지만, 집안 사정 등등 다시 발목이 잡혀 오랫동안 입시학원을 꾸려 왔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주위의 사람들이 또 “선생님 그림이 궁금하다.”는 소리를 듣게 됐고, 공교롭게 이때쯤 아버님도 작고를 하셔서 비로소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학원을 접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나의 그림, 나의 길’에 대한 생각을 공 굴리며 다시 나만의 작품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공 공부가 작업에 도움이 되는가 하고 물으니 “처음의 경로는 달라도 다 산에 오르듯 작업을 하다보면 전공의 차이는 사라진다고 봅니다. 마치 혈액형은 바꿀 수 없지만 성격은 누굴 만나고 어떤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 말입니다.”라는 근사한 답이 날라 온다.

집에서 사람도 잘 안 만나고 그림만 그리면 좀 답답하지 않을까 했더니 “그림이란 게 묘해요. 누구든 더 좋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자나요. 근데 이게 쉽지가 않거든요. 방안에 앉아 그림이 잘 되면 신도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또 안 되면 그렇게 미워질 수가 없지요. 말하자면 무슨 연애하는 것처럼요. 안 그리면 꿈에 빚쟁이처럼 그림이 나타나요. 그래서 붓을 들고 덤비면 또 막혀 버리고....... 이게 소위 밀당의 고수라는 겁니다. 될 듯 말 듯~ 그러다 보니 나이만 훌쩍 먹었지요.” 참고로 그는 막 오십대에 진입한 싱글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말은 가볍게 하지만 왜 질곡과 번민이 없을 것인가.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 그려왔던 대로 앞으로도 갈 거라고 한다. 시류에 따라 억지로 바꾸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꾸준히 차곡차곡 가다가 혹 변화하라는 내부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때 자연스레 몸을 맡길 생각이다.

그의 작업 방법은 단순하다. 처음에는 뭔가 자기만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여러 과도한 시도를 했는데 오히려 그게 소비적이었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하자니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 부분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젯소, 아크릴 물감, 바니시 순으로 작업을 한다고 한다. 물론 때에 따라 가끔 다른 재료, 일테면 주사기, 수정액(화이트), 스펀지, 수세미, 화장지 등등의 재료가 쓰이기도 하지만 아주 드믄 일이라고 한다. 작업속도는 캔버스 크기나 소재, 주제 등에 따라 달라지지만 종일 집중하면 한 작품에 보통 2일~3일 정도면 된다고 한다. 때로 허리가 아프거나 너무 덥거나 추울 때 그의 작업은 조금 지연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지연이 더 생각하고 더 보고 더 신중해질 수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크레파스를 녹여 쓰는 등 작업과정에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이제는 달리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희망을 접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크게 보이는 자신의 결핍을 먼저 바로잡는 게 순서라는 생각 때문이다. 미진한 무언가를 찾는다면 비로소 커다란 그림을 그릴 것 같다고 한다. 지나친 결벽이나 겸손이 아닌가 하면서도 하기사 사람 사는 일이니 저마다의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는 지금 더 안정되고 단단해지길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화제도 바꿀 겸 작년에 어머니와 함께 전시를 했는데 어땠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어머니도 저처럼 행복도 느끼고 허탈감도 느끼셨겠지요.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행복해 하셨고, 심지어는 전시가 끝난 작품에도 무언가 수정을 하겠다며 붓을 달라고 할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지금 어머니는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또 모르지요.” 하며 웃는다.

그는 학원을 그만두고는 다른 직업을 갖질 않았으니 전업 작가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어떤 생각이 하는가 물었다. “전업 작가란 작가의 활동을 제외하면 백수란 의미여서 바로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이 되지요. 예전에 어떤 지원이 절실한가 하는 질문에 보통 창작공간이나 작업 공간의 지원금(월세의 몇 퍼센트 정도) 얘기를 많이들 말씀하시는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작가에게 창작공간은 어쩌면 학생에게 주는 공부방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엄청난 의무감에 밀려 숙제하듯 작업을 하고, 또 이만큼 숙제를 했다고 전시를 하는 형태로 반복되고 있지요. 저는 그도 방법일 수 있지만, 다른 지원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월별 혹은 분기별 경매전시(일정 자격이나 추천받게 된 작가들을 모아 전시를 하고 마지막 날 경매로 마무리 하는)같은 거지요. 물론 관이나 후원단체에서는 홍보, 전시장, 경매 운영을 지원하는 거지요. 그리고 판매수익의 몇 할은 다시 운영비로 되돌리는 시스템. 이렇게 된다면 작가 자신들은 어디서든 치열하게 작업을 할 것이고 누워서 떨어지는 감만 바라보다가는 결국 지쳐 바닥나는 그림은 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문화강국’을 얘기하면서 방탄소년단을 얘기하고 있지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처절하게 생계 문제와 싸우는 수많은 전업 작가들이 뒤섞여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각종의 행사를 펼치며 화수분의 예산을 퍼붓고 있고 그 결과도 신통치 않다. 그래서 지역의 문화 발전 방안을 물으니 “일단, 전시공간이 많이 생겼음 하는 거죠. 기존의 무겁고 권위적인게 아니라 작고 좁지만 문턱이 낮아 일반인들이 부담 없이 쉬거나 관람을 하러 오는 일거양득의 공간, 또 하나는 아무 작가나 막 대관을 하는 게 아니고 철저한 검증을 거쳐 작가를 섭외하는 대신 대관료도 수수료도 없이 하는 거지요. 전시 후 작품 하나는 기증하는 조건 정도? 그리고 미술관 운영자는 홍보와 판매에 능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그렇게 되면 미술관(갤러리) 하나로도 춘천의 랜드 마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믿고 가는 미술관, 믿고 보는 갤러리를 만들어야 하는 거지요” 라는 경쾌한 답이 온다.

그는 보통은 밤에 작업하고 낮에 쉰다고 한다. “밤에 다른 사람들이 지쳐서 잘 때 뭔가를 하려고 도모하며 자유로운 망상을 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작업이 안 되면 영화를 보든 책을 보든 하염없이 멍을 때리든 하여간 뭔가를 합니다. 그러다 아침 10시, 별일 없으면 잡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때 잘 수 있는 특권이니 별일 없으면 안 일어납니다~^^”며 웃는다. 그래서 그게 건강에 안 좋은 게 아니냐고 하자 “건강은 걷는 게 좋다는 데 꾸준하질 않고, 술은 줄여야 하는데 그건 꾸준합니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잠시 장난기와 철은 무슨 관계일까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저는 춘천이 정말 잘 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춘천은 호반, 닭갈비, 막국수의 도시입니다. 이게 언제 이야기인가요. 또 문화는 당장 배가 고프고 옷 한 벌이 아쉬운 사람들에게서는 피우기 어렵지요. 문화는 시간이 필요하고 투자가 필요하고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점 춘천을 이끄는 분들이 잘 고민해서 방향을 잘 잡아 달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그의 그림은 어딘지 구식이다. 아주 낡고 낮은 지붕을 달고 쓰러질 듯 서 있는 집, 옆으로는 주름살을 닮은 골목을 따라 길은 휘어져 있고 그 위로는 비현실이리만치 밝고 따뜻한 달이 떠 있다. 마치 지상의 모든 슬픔이 빚은 눈물을 씻어주듯 안아주듯 달은 멀리서 망연히 이곳을 쳐다보고 있다. 지금 세상은 먹방에 여행에 살판난 듯 하지만 여전히 작가들의 삶은 빠듯하다. 가난에 자신의 이름을 팔지 않는 청빈이 귀해진 요즈음 이런 화가들은 격랑을 건너는 징검돌처럼 고향을 지키고 우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거칠게 반죽한 듯 어두운 화풍에서 꽃이 피고 환한 산과 들이 보인다. 모종의 자극이 그의 어딘가를 건드린 것이다. 자고로 홀애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 했든가. 슬픔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보는 것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 앞에서 좋고, 좋으면 박수를 치면 될 일이다. 이제 무명의 화가들을 보고 ‘너희들은 왜 땀을 흘리지 않는가’ 라는 힐난을 멈추자. 이미 그들은 삶의 고단함을 충분히 맛보고 이를 사무치게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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